(11) 흔한 디자이너의 작업일기

[눈으로 보이는 생각 : Branding] (11) 흔한 디자이너의 작업일기

664
SHARE
시간과 공간의 방

에프터모멘트 크레이티브 랩 박창선 CEO가 브런치에 게재한 글을 편집한 뒤 모비인사이드에서 한번 더 소개합니다.

물론 이것은 모든 디자이너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지극히 저만의 일기입니다. 그러니 공감이나 그런건 기대치 않습니다. 그냥 아, 이렇게 디자인하는 사람도 있구나…하면 됩니다.


 

1. 켜고 열기

일단 오퍼를 받고나서, 상세한 내용이나 자료를 메일로 받습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자료를 열어봅니다. 자료는 보통 압축파일입니다. 책상엔 커피와 케익이 있어야합니다. 두 손을 쉴새 없이 움직이는 데 대부분은 뭐 먹느라 그런 것 같습니다.(디자인을 좀 이렇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압축을 푸는 작업은 언제나 설렙니다. 새로운 문명역사의 한 챕터를 여는 기분입니다. 또 어떤 자료들과 어떤 이야기들이 있을 지 흥미진진합니다. 떨리는 손가락을 놀려 클릭을 하도록 합시다. 여기에 풀기를 누릅니다. 그렇습니다, 전 여기에 압축을 풀것입니다. PPT파일과 워드파일, 가끔 메모장 파일도 있습니다. 아름다운 굴림체가 저를 반깁니다. 저도 반가우니 인사를 해줍니다. 안녕? 날 굴릴거니? 굴림체가 ‘응’ 이라고 대답합니다. 후훗, 녀석과 전 오래된 친구같습니다.

케익은 주로 딸기케익이 좋습니다. 달달하고 고소한 맛을 동시에 느낄 수 있습니다. 아메리카노는 아이스를 주로 시킵니다. 오래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작업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낍니다. 왜냐면 한 번도 짧게 걸린 적은 없었기 때문입니다.(뭔 개소리야…)

 

2. 켜고 열기2 (유튜브)

….죄송합니다..

컴퓨터로 켜면 왠지 모르게 손이 크롬으로 갑니다. 이어폰을 꽂고 있으면 귀의 명령에 의해 자연스레 유튜브를 클릭하고 추천 동영상을 보고 있습니다. 피키캐스트에서 이거레알 신작이 나왔습니다. 와씌..이 사람들은 영상을 너무 재밌게 잘 만듭니다. 요즘 연애플레이리스트를 보는데 아주 풋풋해 죽을 것 같습니다. 웃음과 감동이 가득한 영상을 보며 감수성을 끌어올립니다. 이렇게 어느정도 레벨이 넘으면 그 때부터 디자인을 시작해야합니다. (개소리2)

 

3. 뺨때리기

유튜브는 잘못이 없습니다.

뺨을 때립니다. 왼손으로 때려서 왼쪽뺨을 때리도록 합시다. 정신을 차려야합니다. 유튜브 동영상 3, 4개만 봐도 1시간이 후딱 지나갑니다. 진정한 타임킬러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감수성이 충만해졌으니 그것으로 위안을 삼아봅니다. 누구에게나 백지에 디자인을 시작하는 일은 떨리는 일일테니, 그 설레임을 안고 다시 포토샵을 열도록 합시다. 가로세로 적당한 픽셀로 대지를 만들어주고, 다시 요청파일을 열어봅니다.

 

4 . 바라보기

음…

한참동안 읽으면서 핵심을 파악합니다. 사실 저는 알고 있습니다. 이 요청메일은 그저 훼이크입니다. 진짜 원하는 시안이 어딘가 암호처럼 숨겨져 있습니다. 세로드립인가? 또는 에니그마인가? 레몬즙을 뿌리거나 물을 뿌려보거나 빛을 비쳐보면서 숨겨진 니즈를 찾아내도록 합시다.

 

5 . 꿀잼

핀터레스트는 꿀잼입니다.

니즈가 대충 파악되었으니, 레퍼런스를 한번 찾아보도록 합시다. 디자인엔 묘하게 관성이 있어서, 레퍼런스와 눈에 들어온 게 많아야 쏟아지는 것도 있습니다. 이 클라이언트의 니즈는 모던하지만 클래식한 컨셉을 원하고 있습니다. 핀터레스트에서 모던한 것과 클래식한 것을 동시에 찾습니다. 혹시 몰라서 구글에 “모던한데 클래식한 것”을 검색해봤습니다. 페이지요청을 찾을 수 없다면서 꺼졌습니다. 후우… 좋습니다. 하지만 핀터레스트의 현자들은 그 답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답을 구해보기로 합니다. 그럴싸한 것이 나올 때까지 스크롤을 내립니다.

너무 내렸다…

계속 내려버렸습니다… 아..보면 볼수록 뭔가 자괴감이 듭니다. 이 녀석들 너무 잘하잖아…. 세상엔 정말 다이아손 티타늄손 아다만티움손들이 가득합니다. 잠시 자괴감에 빠져서 반성의 시간을 갖도록 합니다. 아..나란 존재란…. 존재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과 나의 수정란 시절에 어떤 문제가 있었길래 나는 이런 것을 만들지 못하는 것인지 고민해봅니다. 다음 생이나 되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앨런머스크씨에게 희망을 걸어봅니다. 어서 날 영생하게 해주세요.

 

6 . 작업

시간과 공간의 방

끝도 없는 작업의 세계로 빠져듭니다. 분명 나는 30분정도 한 것 같은데, 4시간이 지나있습니다. 이런 미친…. 시간만 잘갑니다. 어쩔때는 4시간을 한 것 같은데 30분 지나있을 때도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디자이너 친구에게서 영감을 받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보통 이 시점엔 화장실을 가지 않습니다. 방광염의 위험이 높아집니다. 밥도 먹지않고, 전화도 받지 않습니다. 톡은 가끔 합니다. 붐비치도 합니다..뭐여 이건…

 

7 . 산만해지기

산만해집니다.

집중력이 한번 떨어지는 시기가 옵니다. 보통 이럴 땐 어디가 간지럽거나 배가 고픕니다. 뭔가 생각이 안돌아가고, 무엇보다 그 색이 그 색같고 그 디자인이 그 디자인 같습니다. 눈이 뭔가를 잘 구별하지 못합니다. 하도 비슷한 색을 계속 보고있다보니 뭐가 뭔 색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눈이 뻑뻑해지고 머리가 아픕니다. 눈물액을 넣어주도록 합시다. 다시 자료를 찾아봅니다. 산만하게 움직이며 오늘은 글렀다라는 것을 두뇌에게 알려줍니다. 두뇌는 그 명령을 받아서, 그럼 밥이나 먹으라는 지시를 내립니다. 제 몸은 소중하니까 그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도록 합시다.

 

8 . 작업2

다시 돌아와서, 시안을 보니…뭐 같습니다. 시안을 지웁니다. 그리고 다시 선을 하나 긋고 거기서부터 시작합니다. 카페를 옮겼습니다. 보통 카페에는 땅의 기운이란 것이 있는데, 3~4시간 정도 앉아있다보면 그 땅의 기운이 쇠하기 시작하면서 영 엉덩이도 불편하고 집중력도 생기지 않습니다. 다른 카페의 명당자리로 가서 가이아의 힘을 빌리도록 합시다. 지구야 힘을 줘. 제발.

왠지 모르겠으나, 전 두번째 집중할 때가 폭풍입니다. 이 때는 심지어 똥도 참을 수 있습니다. 더욱 묘하고 이상한 것은 배아픈걸 참으면서 디자인하면 더욱 잘됩니다. “이것만 끝내고!!! 제발…이것만 끝내고!!!!! 가야지!!!!!!”라는 강한 의지는 괄약근과 대장의 힘조차 컨트롤할 수 있게 해줍니다. 정신력이 육체를 이긴다는 것을 몸소 체험하고 경험했던 간증입니다. 분명 사람은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디자인을 하다보면 그런 느낌이 많이 듭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내 손과 머리의 그 분이 다 사라져버릴 것 같은 기분. 이 때 건드리면 안됩니다. 그게 누구든 짜증이 날 수 있습니다. 그리곤 그 분이 사라지고 두번 다시 돌아오시지 않습니다. 내일을 기약해야 합니다. 보통 그 분은 하루에 한 번 정도만 강림하시기 때문에 이 타이밍을 제대로 잡지 못하면 폭망입니다.

 

9 . 그분과의 작별

보통 그 분이 오셨을 땐 인간의 본능과 고통을 모두 잊게 하는 힘을 주십니다. 그 분이 떠나시고 난 뒤에야 뒷목과 어깨와 허리가 미치도록 아픈 것을 느낍니다. 다른 쪽 손으로 내 어깨를 주물러 보지만 아무짝에도 소용없습니다. 내 손이 힘드니까요. 디자이너를 위한 마사지샵이 있으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그분이 가시고 나면 이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시안을 다시 물끄러미 바라보도록 합시다. 딱히 손이 움직이지 않으니, 눈동자라도 움직이며 이상한 것을 찾아봅시다. 보통 이럴땐 700%정도로 확대시켜놓고 정렬이나 픽셀정리를 해줍니다. 눈이 빠져버릴 것 같습니다. 인공눈물액은 필수입니다.

 

10 . 크리틱의 시간

클라이언트에게 보내기 전에 디자이너 친구에게 물어봅니다. 디자이너가 아닌 친구에게 물어보면 그냥 다 이쁘다고 해주므로 의미가 없습니다. 사실 원래는 디자이너에게 물어보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고객이나 클라이언트는 디자이너가 아니므로 그들의 시선을 빌리는 것이 더 맞지만, 왠지 모르게 디자이너친구에게 인정받으면 기분이 좋기 때문에 기분이 좋아지기 위해서 그냥 이미지를 전송해봅니다.

음, 친구가 이상하다고 하네요.

 

11 . 반성의 시간

방구석에 가서 우울해지도록 합시다. 뭔가 모든 것이 무너지고 짜증나면서 ‘니가 뭘 알아’를 외치고 싶지만, 또 그렇게 그냥 넘기자니 찝찝합니다. 고쳐야 할 것 같긴합니다. 또 말을 들어보니 그게 그런것 같기도 합니다. 원래 혼자서 끊임없이 같은 시안을 보고 있다보면 그지같은 것도 뭔가 점점 괜찮아 보인답니다. 그래서, 객관성을 점점 잃어가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개털리고 나야 다시 시선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꼭 필요한 시간이지만 그 친구의 멱살을 잡고싶은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내일모레 정도 만나서 멱살을 잡도록 하겠습니다.

수정합니다.

수정을 합니다. 그림을 재탕해서 죄송합니다. 수정작업은 뭔가 그분이 오시든 안오시든 무조건 해야하는 것이므로 스트레스가 심하고 속도가 느립니다. 하다보면 또 가끔 잔여물처럼 남은 그분의 흔적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것은 드문 경우입니다. 이미 이 정도가 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맞습니다. 그냥 집에가서 팬티만 입고 누워자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데드라인은 소중하므로 지키도록 합니다.

반복됩니다. 이렇게 몇 차례 수정이 이루어지고 나면 클라이언트님에게 메일을 보냅니다. 메일은 보통 새벽에 보내게 됩니다. 왜냐면 이렇게 하고 나면 절대 해떨어지기 전에 뭔가를 만들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가시고 난 다음엔 예비 그분인 새벽감성님이 오시는데, 새벽감성님의 힘도 만만찮게 강력해서 꽤나 괜찮은 시안들이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가끔 맥주 한캔님의 힘을 빌리기도 합니다. 그분의 힘은 강력하지만 지속시간이 짧고 떠나시면서 뱃살을 주고가신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메일을 보냅니다. “요청하신 시안드립니다”라는 제목을 쓰고 어찌고저찌고 메일을 쓰면서 오늘 하루 새까맣게 태워진 영혼의 가루들을 주섬주섬 챙기도록 합시다. 인간의 회복력은 놀라워서 흩어진 영혼들을 지우개똥처럼 다시 뭉쳐서 동글동글 말아놓으면 내일 또 멀쩡하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내일 클라이언트님이 시안을 보시면, 아마 또 뭔가 피드백을 주실 것 같습니다. 헤헤헤..재밌겠다….

 

– 디자이너의 하루 끝 –

 

[눈으로 보이는 생각 : Branding] 시리즈

(8) 디자이너를 위한 표정으로 알아보는 클라이언트의 유형
(7) 뭔가 조금 솔직한 제안서 이야기(팩트폭행주의)
(6) 마케터를 위한 알쏭달쏭 클라이언트들의 용어정리
(5) 회사소개서를 만들어보자! (빡셈주의).

 

 

Comments